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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섰다. 꺼냈다. 못하면서. 내내 건 긴장감은 대신할만한게시를 쓰고 있는 윤경선 시인. /유은상 기자


3개월에 한 번씩 / 정수기 아저씨가 필터를 / 갈아준다 / 보기엔 맑은 물인데 / 뭐가 걸려 나오는지 유심히 본다 // 정화된 물로 / 밥 짓고 국도 끓여 먹었으니 / 맑은 피가 흐르겠지 // 방심하는 사이 / 촘촘한 필터 사이로 / 언제 흘러들어갔는지 / 시커먼 말들이 쌓이고 / 뾰족한 가시가 튀어나온다 // 다시 필터를 갈아야겠다.
시인이 정수기 필터 교체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쓴 시입니다. 시기와 질투, 비난, 증오 등을 걸러내고 삼가며 살아야 함을 스스로 되새깁니다.
합천 청덕면에서 농사짓는 윤경선 시인의 시입니다. 그는 지난 8월 첫 시집다모아릴게임
<논두렁 올림픽>을 출간했습니다. '농부시인'이라고 하지만 시인이 부업 또는 소일거리로 농사를 짓는 것과 전업 농부가 시를 짓는 것은 의미가 다릅니다. 후자인 그에 대한 호기심과 존경심 등이 겹쳐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완연한 가을로 접어든 시기 농부에게는 황금 같은 시간입니다. 그는 그 귀한 시간 일부를 할애했고, '10월 어느 멋진 날' 그를 만주식입문
났습니다.
'양파의 등굣길'
올해 우리 나이로 예순여섯인 그는 합천군 용주면에서 태어났다. 당시 농촌에서 딸로 태어나는 것은 벌써 운명 일부분을 결정하고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난한 농부의 4녀 2남 둘째 딸인 그는 공부가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중학교는 졸업해야 한다최근주가지수
고 떼를 써 입학은 했지만 아버지는 그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이 등교하는 동안 그는 집안일을 돕고, 농사일을 돕고, 소를 먹여야 했다. 그때의 아픔은 '양파의 등굣길'이라는 시에 고스란히 담겼다.
단발머리 찰랑찰랑 / 논두렁길 따라 등교하는 양파들 // 등교하는 친구들 부끄러워 / 소 등 뒤에 숨었다 / 유년시절 책가방 대신부자클럽
/ 소고삐 쥐고 이산 저산….
그는 부산방직공장에 가면 야간 학교를 다니게 해 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듬해 부산으로 갔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며 중학교는 마쳤지만 일이 너무 힘들어 고등학교 졸업장은 얻지 못했다. 그렇게 줄곧 부산에서 회사에 다니다가 스물셋 꽃다운 나이에 선을 봤고, 이웃 청덕면으로 시집을 오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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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때 선을 보고 11월에 시집을 갔습니다. 시고모와 친정 엄마가 아는 사이라 선을 보게 됐습니다. 신랑은 당시에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부지런하고 인물이 좋다며 부모님이 적극 권유했습니다. 결혼하고 부산에 가서 신접살림을 사는 것으로 약속이 돼 있었지만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장남이라 시부모와 시동생도 보살펴야 하고 또 이듬해 바로 임신을 하면서 그렇게 됐습니다."




윤경선 시인이 들깨 수확을 하고 있다. /유은상 기자


삶의 애환을 달래는 힘
그가 처음으로 시를 접하고 감동 느낀 것은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였다. 당시 이발소와 다방 등 여기저기에 표어처럼 걸렸던 바로 그 시가 그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그만큼 삶이 고됐기 때문일 것이다.
"여고생 때 기숙사에서 지내다 나중에는 자취를 하게 됐습니다. 방을 구하고 집들이를 하는데 친구 중 한 명이 그 시가 적힌 액자를 선물로 가져왔어요. 그런데 읽을 때마다 묘하게 위로가 되는 것을 느꼈어요. 곧장 헌책방을 찾아서 시집을 사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힘든 시기에 큰 힘이 됐어요."
그렇게 친해지기 시작한 시가 그의 삶에 더욱 가까이 찾아든 것은 시집살이를 할 때였다. 시어머니는 의심이 많았고, 그는 늘 스트레스와 긴장 속에 살아야만 했다.
"시어머니가 의심증이 있었어요. 남을 항상 의심하고 험담하고 그런 편이었는데…. 제게는 '쌀을 퍼다가 친정에 가져다준다'고 하거나 '몰래 농작물을 팔아서 돈을 챙긴다'고 의심을 자주 했죠. 한 번은 참지 못해 아이를 들쳐 업고 부산 큰 시누이 집으로 가출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때 그를 다시 다독여 줬던 것이 바로 시다. 당시 중학교에 다니던 딸이 편지와 함께 시집을 선물했다.

"딸이 준 편지에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그 어린 것이 보기에도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용돈을 모아서 책을 선물하겠습니까. 이해인 수녀의 시집이었습니다. 그 책을 읽으며 위안을 느꼈고, 그렇게 다시 시집을 꺼내 읽기 시작했습니다."




윤경선 시인이 40년 가량 적어온 일기장을 보고 있다. /유은상 기자


거듭되는 주경야독
그의 삶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를 꼽으라면 주경야독이 빠질 수 없다. 소녀 시절 낮에는 방직공장에서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고 저녁에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학교를 다녀야만 했다. 그렇게 끝날 줄 알았던 주경야독 생활을 그는 30대 후반에 다시 시작한다. 이번에는 시를 배우고 익히고자 고된 길을 기꺼이 나선 것이다.
"시집과 책도 꾸준히 읽었지만 일기도 계속 적었습니다. 시집오고 곧장 시작해 지금까지 40년 가까이 됩니다. 그러다 하루는 농민신문의 농촌수기에 응모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수기를 적었습니다. 보내기 전에 좀 봐줄 사람을 찾다가 <합천문학> 사무국장이던 송국복 선생님과 연결이 됐습니다. 그렇게 저의 시 선생님이 됐습니다."
합천교육장으로 교직을 마감한 송국복 선생은 합천 지역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그는 송 선생이 야간자율학습 감독을 하는 날에는 매번 학교를 찾아 시를 배웠다. 그는 그렇게 다시 주경야독이자 특별한 야간자율학습을 이어갔다.
"두어 편 시를 적어서 가면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수정하면서 배웠어요. 또다시 숙제를 내주면 시를 적어가고 그렇게 반복했습니다. 참 선생님을 많이 귀찮게 해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열정으로 봐 주셔서 너무 감사하지요. 무엇보다 시를 쓰는 저를 지지하고 묵묵히 뒷바라지해준 남편과 가족에게도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후에도 배움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합천문인협회에 들어가 지역 문인과 교류하며 성장을 거듭했고, 영남대학교 문학예술과정도 수료했다.




윤경선 시인이 등단패와 각종 상장을 보여주고 있다. /유은상 기자


누군가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는 시
농부시인이라고 하면 농사를 짓는 이들이 취미생활로 시를 적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짙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그 수준을 훨씬 넘어섰고, 자신만의 문학세계를 탄탄하게 쌓아가고 있다.
그런 노력 끝에 2013년 '동피랑' 외 2편이 선정, <영남문학>에서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지금은 합천문인협회 부지부장, 합천예총 이사, 합천 청덕면 새마을문고 회장을 맡고 있다.
지난 8월에는 자식처럼 정성들여 지어온 80여 편의 시를 엮어 첫 시집 <논두렁 올림픽>을 출간했다. 이달균 시인은 추천 글에서 '윤경선 시집은 맑고 천진한 동화적 상상력으로 가득하다. 애써 멋 부리지 않고, 현란한 수사를 동원하지 않는 편안함이 좋다. 언어의 인플레이션 시대에 이런 자연스러움은 숲을 떠다니는 반딧불처럼 빛난다. 그런 시들을 보면서 혼탁한 눈을 씻는다'라고 평가했다.
윤 시인도 '시를 읽고 쓰는 것은 내 삶의 원동력이자 보약 같은 시간이었고, 저를 가꾸고 다듬는 소중한 일이었습니다. 정성껏 가꾼 농산물이 필요한 사람에게 자양분이 되듯 흙손으로 쓴 시들도 세상 밖으로 나가서 누군가의 가슴에 한 구절이라도 닿아 설렘과 그리움, 위로와 희망이 되길 바라며 이 책을 엮습니다'라고 밝혔다.
그는 시인으로서 2권, 3권 시집을 더 내는 것이 또 다른 바람이라고 했다. 윤 시인에게 시를 쓰는 것은 인내하고 성찰하는 시간이자 자신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행위였다. 윤 시인이 자신에게 효험이 있었던 처방이자 보약을 이제는 현대의 아픈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건네고 있다.
/유은상 기자